2021-12-16 00:26:14

‘불성-불계의 마음’에 대한 고찰: 인간의 ‘참된 생명’에 대한 ‘이타적 자기중심’과 ‘이기적 자기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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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의 ‘참된 생명’을 살리는 ‘불성-불계의 마음’을 분석하기 위해, 먼저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자기중심적이다.
여기서 내가 말한 ‘자기중심’은 자신의 ‘욕구’를 생각해보면 된다. 우리는 ‘광선유포를 서원하는, 세계평화를 위하는 숭고한 마음’도 ‘자신의 욕구’라는 것을 인지(認知)해야 한다. 이것은 ‘자타 함께 행복과 평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다. 자신이 쉽사리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숭고한 욕구’에 대한 ‘무명(無明)’이다. ‘무명’은 「나의 마음의 모습을 분명(分明)하게 깨닫지 못함」(어서 564쪽)을 말한다.
이해를 돕고자, 2019년 11월 18일에 발매된 아이유(IU)의 앨범 ‘Love poem’의 6번 트랙 ‘Love poem’이라는 곡의 소개에는 이러한 문구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타성이란 그것마저도 이기적인 토대 위에 있다.”
‘자신의 욕구’라는 ‘이기적인 토대’를 말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이다.
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에는 ‘이타적 자기중심’과 ‘이기적 자기중심’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참고로 이것은 자타(自他)의 ‘참된 생명’에 대한 ‘이기적 자기중심’과 ‘이타적 자기중심’을 말한다. 여기서 ‘자타’는 ‘나와 나’ 그리고 ‘나와 남’을 의미한다. 자타의 ‘참된 생명’을 살리는 방향이냐 죽이는 방향이냐를 이야기한 것이다.
여기서 ‘참된 생명’에 대한 이해를 위해선, 창가학회(創價學會)가 신봉하는 ‘니치렌불법(日蓮佛法)’ 속 몇 가지 교학적 개념과 이해가 필요하다. 쉽게 말해보자면, 자기 자신의 ‘참자아’를 생각해보면 된다. 참자아는 ‘내가 원하는 참된 나’라고 생각해보면 된다. ‘참되다’는 ‘진실하고 올바르다.’라는 의미다. ‘내가 원하는 밝고 슬기롭고 진실하고 바람직하고 올바른 나’라고 생각해보면 된다.
어서 1056쪽에는 「독기심입(毒氣深入), 실본심고(失本心故)」가 나온다. 이것은 묘법연화경병개결 486쪽의 ‘양의병자의 비유’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말은 ‘방법(謗法)이라는 독기가 깊이 들어가 깊은 미혹에 빠져 본심을 잃어 불성의 힘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방법(謗法)’은 ‘비방(誹謗) 정법(正法)’의 줄임말로, 법화경을 「마음으로 배반함」(어서 823쪽)을 뜻하고, 「방(謗)은 바로 괴배(乖背)의 이름」(어서 427쪽)이라고 씌어있다. ‘괴배’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에 어그러져 등짐.’을 뜻한다. 여기서 ‘본심(本心)’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니치렌불법에서는 인간의 생명상태를 크게 열 가지로 분류한다. ‘십계(十界)’란 10종류의 생명경계로 ‘지옥계·아귀계·축생계·수라계·인계·천계·성문계·연각계·보살계·불계’를 말한다.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어서 498쪽)라는 말씀처럼, 니치렌불법에서는 모든 인간이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 ― ‘불계(佛界)의 생명’ 즉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부처의 생명’을 ‘진실한 자신’ 그리고 자신의 ‘진실한 생명’이라고 표현한다. 자기 자신을 살리는 ‘진실하고 올바른 자신이자 생명’이다. 불성(佛性) 즉 ‘부처의 성질’ 중에 대표적인 것은 ‘선성(善性)’ ‘창조성’ ‘주체성’이다. 이 ‘불성-불계의 마음’을 법화경에서 ‘본심(本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불성-불계의 마음·생명’을 나는 ‘참된 생명’이라고 표현한다. 방법(謗法)이자 독기(毒氣)와 같은 마음들은 자타의 ‘참된 생명’을 죽이는 마음·생명이다.
자타의 ‘참된 생명’을 죽이거나 살리는 마음·생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가 말하는 ‘이타적 자기중심’과 ‘이기적 자기중심’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남을 위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진정으로’ 남을 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타의 ‘참된 생명’을 죽이는 마음·생명은 자신의 ‘이기적 자기중심’이고, 자타의 ‘참된 생명’을 살리는 마음·생명은 자신의 ‘이타적 자기중심’이다. 내가 말하는 ‘이타적 자기중심’은 인간의 ‘참된 자기중심’이다.
‘이기적 자기중심’은 자기 자신이 ‘남을 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흔히 말하는 ‘사랑’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 사랑은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받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 말에 동의하지 못하면 자신의 ‘이기적 자기중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참된 역지사지’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생긴 나의 사고방식·마음·관점으로 상대방의 처지와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사고방식·마음·관점으로 상대방의 처지와 상황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역지사지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사고방식·마음·관점을 알기 위한 대화가 불가결(不可缺)하다. ‘대화 속의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疏通)’의 사전적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뜻한다. ‘오해(誤解)’의 사전적 의미는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런 해석이나 이해.’를 뜻한다. 자신과 상대방이 서로에 대한 오해가 없을 때까지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역지사지’를 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 자기중심’으로 자기 자신이 상대방을 판단한 것이다. ‘이기적 자기중심’으로 인해 ‘참된 역지사지 능력’이 없으면, 진정으로 타인을 배려하기 힘들다. 진정으로 타인을 공감하기 힘들다. 이러한 ‘참된 역지사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기적 자기중심’의 인간에서 ‘이타적 자기중심’의 인간으로 발전하느냐 못하느냐가 달려있다.
‘참된 역지사지’에 대한 무명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모르는 그 ‘이기적 자기중심’에 지배당하면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악업(惡業)을 쌓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다. ‘이기적 자기중심’에 지배당하면 ‘나는 광선유포 하고 있다.’라는 착각에 빠진 채, 전혀 남에게 공감해주지 못하고 배려가 없으며 ‘가짜 행복과 평화’를 자신도 모르게 열심히 유포하게 된다. ‘원품의 무명〈생명의 무지·미혹·암흑〉’이 원인인 ‘이기적 자기중심’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열심히 방법자(謗法者)가 되고 파화합승(破和合僧)이 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다.
‘이타적 자기중심’과 ‘이기적 자기중심’의 차이에 대해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욕심과 원(願)의 차이’에 대해 법륜스님의 말씀을 소개하겠다.
“욕심과 원(願)의 차이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우면 욕심이고, 괴롭지 않으면 원(願)입니다. 원(願)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좌절하고 절망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연구합니다. 연구하는 사람은 괴로움이 없습니다. 연구할 때 괴롭다면 노력은 하지 않고 결과만 좋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https://story.kakao.com/ch/hopeletter/GJMYjOD2Ox0
법륜스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참고해서 말하자면, 욕심은 자신의 ‘참된 생명’을 죽이는 ‘이기적 자기중심’이고, 원(願)은 자신의 ‘참된 생명’을 살리는 ‘이타적 자기중심’이다.
또한, 이 ‘욕심과 원(願)의 개념’을 이용해, 내가 말하는 ‘광포 욕심’과 ‘광포 서원(誓願)’의 차이를 말할 수 있다. 자신이 ‘이기적 자기중심’의 ‘광포 욕심’의 상태냐, ‘이타적 자기중심’의 ‘광포 서원’의 상태냐를 점검할 수 있다.
‘광포 욕심’은 자신의 마음이 ‘상대방의 진실한 행복과 평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마음을 관찰해보았을 때, 상대방의 진실한 행복을 바라고 그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깨달음을 알리고 싶은 욕구에 지배당해 ‘가르치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귀를 여는 경청과 공감의 대화·소통 없이 간부가 ‘상대방을 구하고 싶은 마음만 앞서’ 지도(指導)하거나 가르치려 하는 마음이다. 상대방의 진실한 행복에 초점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의 가르침으로 감동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는 마음’으로서, 상대방의 모습에 의해 자신의 행·불행이 결정되는 마음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복의 주체’가 ‘외부’에 있는 것이므로, 자신의 ‘참된 생명’을 죽이는 ‘이기적 자기중심’에 지배당하는 모습이다. ‘지혜’와 ‘자비’의 생명이 닫힌 마음의 모습이다. ‘이기적 자기중심’에 의해 자신은 상대방에 대한 ‘자비’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실상은 ‘무자비’의 모습이다. 이것이 ‘광포 욕심’의 마음이자 자타의 ‘참된 생명’을 죽이는 ‘이기적 자기중심’이다.
이 내용과 관련해서 ‘이기적 자기중심’의 마음 중에 ‘반(反)법화경적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만심(慢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만심은 ‘불경보살(不輕菩薩)의 마음’이 아니다. ‘만심’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업신여기며 잘난 체하는 마음.’이다. ‘업신여기다’는 ‘교만한 마음에서 남을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다.’라는 의미다. ‘교만(驕慢)’은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을 뜻한다. 따라서 ‘만심(慢心)’은 타인을 자신보다 아래로 낮춰서 두고 하찮게 바라보는 것이다. ‘굳이 상대방보다 나를 높이지 않았다.’ 생각하더라도, ‘내 위치는 그대로다.’ 생각하더라도 상대를 낮춰 보는 그 자체를 바라보면 자신이 상대방보다 위에 있다. 그렇게 상대방보다 자신을 높이고 우월하다고 여기는 ‘만심’이 된다. 다시 말해, 만심(慢心)은 자신이 쉽게 깨닫지 못하는 ‘원품의 무명〈생명의 무지·미혹·암흑〉’에 의한 것이므로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타인의 ‘참된 생명’을 나보다 아래로 두고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배운 것이 많고 ‘깨달음’이 많아서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이 타인보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타인을 자신이 만나서 상대방의 언행을 바라보았을 때, ‘쯧쯧.’ ‘왜 저래.’ ‘진짜 싫어.’라는 마음이 든다면 자신도 모르는 ‘만심(慢心)의 마음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수준이 높은 이러한 사상을 추구하니까 위(上), 너는 수준이 낮은 그러한 사상을 갖고 있으니깐 아래(下)’라는 ‘굉장한 만심’이다. 그 마음에는 이미 상대방의 ‘참된 생명’을 존중하거나 상대방의 진실한 행복과 평화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 ‘법화경의 마음’이 아니다. 자신이 쉽게 깨닫지 못하는 ‘방법(謗法)’이고 자타의 ‘참된 생명’을 죽이는 ‘이기적 자기중심’이다.
이 ‘만심(慢心)’에 대해 참고로 덧붙이자면, 자신이 답답해하는 ‘상대의 무엇’과 관련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상대의 무엇’에 자신이 영향을 받고, 그것을 마음에서 놓지 못해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기혐오’가 있을 수 있다. ‘자기혐오’도 자신의 ‘참된 생명’을 죽이는 ‘이기적 자기중심’의 마음 또는 습관이다.
‘광포 서원’은 자신의 마음이 ‘상대방의 진실한 행복과 평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진실한 행복을 바라고 그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참된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곱게 쓰면서 경청·공감·격려 등의 대화·소통을 함으로써 상대방이 소생되고 진실한 행복과 평화의 방향으로 향했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간부가 ‘상대방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관찰해보면, ‘가르치고 싶은 욕구’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가르침으로 감동하는 것’에만 초점으로 만족을 느끼는 마음’이 아니다. 상대방이 감동하여 상대방이 진실한 행복과 평화로 향했을 때 만족을 느끼며 상대방이 진실한 행복과 평화의 방향으로 향하든 향하지 않든 상대방의 모습에 의해 자신의 행·불행이 결정되지 않는 마음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복의 주체’가 ‘내부’에 있는 것이므로, 자신의 ‘참된 생명’을 살리는 ‘이타적 자기중심’의 모습이다. ‘지혜’와 ‘자비’의 생명이 열린 마음의 모습이다.
나보다 배운 것이 적고 ‘깨달음’이 적어서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보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열등한 자’를 보고, ‘만심(慢心)’을 갖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며 ‘나의 깨달음의 수준으로 상대방을 이끌어주고자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다. 상대방과 자신의 차이를 느끼지만, 타인의 사상에 대해 자신의 마음속에서 위아래로 차별하여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낮춰서 하찮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한 ‘만심(慢心)’이 없는 ‘불경보살(不輕菩薩)의 마음’이다. 이것이 ‘광포 서원’의 마음이자 자타의 ‘참된 생명’을 살리는 ‘이타적 자기중심’이다.
‘불성-불계의 마음’을 알기 위해, 자타의 ‘참된 생명’에 대한 ‘이기적 자기중심’과 ‘이타적 자기중심’을 더한층 이해하기 위해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그리고 ‘이기’와 ‘이타’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뒤에 내용 작성 못함)
'생명 (生命) (2020.11.29. ~ 2023.1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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